범박동, 나의 옛 친구를 떠올리다.
요즘 나의 관심사는 부동산 실거래가 분석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과거를 검증해보면서 미래를 예측해 보는 일이 가장 기초적인 접근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서울 쪽을 둘러보다 좀 더 범위를 넓혀 수도권 중에서 나의 고향 같은 부천시 아파트 실거래가를 정리하기로 했다. 소사본동, 심곡동을 정리할 때는 아무런 감각없이 정리했다. 점차 동을 구분해나가다 ‘범박동’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그때 불현듯 떠오른 친구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몹시도 좋아했던 친구 현주였다. 그 친구는 당시 내가 좋아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한 번 도 그 친구에게 내삭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그 친구가 왜 떠올랐을까?
영어를 사랑했던 소녀
현주는 내 기억에 늘 영어책, 특히 성문기본영어책을 책상 위에 놓고 정독했던 친구로 기억된다.
(이 기본 영어책은 지금도 출간되어 나오고 있다. 정말 대단한 책이다.)
현주는 다른 여고생처럼 유쾌하고 재미있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나이답지 않게 진중하고 사려 깊은 친구였다.
가끔 선생님께 뜬금없는 질문도 했지만, 그런 솔직함이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현주와 나는 고등학교 1학년 같은 반이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 어느 날, 현주는 심한 감기로 조퇴를 했었던 것 같다.
나도 친구가 무척 신경 쓰였다. 그날 교무실에 갈 일이 있었는데, 참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교무실에 계신 선생님들조차도 현주의 감기에 가슴 아파하며 걱정하는 대화를 하고 계셨다.
한 학생의 감기가 선생님들이 모두 걱정할 정도로 큰일이었나? 당시엔 부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장인처럼…
현주는 내 기억엔 분명 독특한 친구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아이였다.
웃을 땐 귀여운 덧니가 보였는데, 그 모습이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매력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실없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매사에 진정성 있는 태도로 선생님들의 기대와 사랑을 받았지만, 최상위권 성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
현주는 그러한 평가들에 신경쓰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그저, 자신만의 길을 아는 사람처럼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향해 갔다.
그런 뚝심 잇는 장인 처럼 느껴졌던 현주를 나는 귀한 친구로 여겼다.
현주가 살던 곳은 범박동이었다.
어느 날 현주는 부모님이 안 계신다며 자신의 집에 가자고 제안했고, 나와 또 다른 친구 셋은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현주의 집으로 신나게 출발했다. 평소 나는 학교를 걸어 다녔기에 버스를 타는 것 만으로도 여행가는 기분이었다.
범박동의 아지트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밤을 보냈다.
솔직히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사춘기 소녀들의 밤은 아마도 짧을 것이다.
현주의 집은 범박동 어느 다세대 주택이었다.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보니, 주변은 재개발이 많이 진행되어 생각보다 집이 별로 없었다.
집 주변은 벌써 이주했거나 철거되어 높은 건물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다음 날 아침 거실 소파에서 해맞이했던 순간은 정말이지 잊을 수 없다.
17살 인생에 해맞이를 본 일이 거의 없었던 나는 잠결에 빨간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뭔지모를 황홀한 감정을 느꼈던 같다. 해돋이는 지금도 희망에 들떠 심쿵하게 만드는 힘을 느끼게 해준다.
아파트촌이 되어버린 범박동, 현주네 가족은 다시 입주해 살고 있진 않을까? 궁금해진다.
아무튼, 그 세 글자만으로도 내 마음 먼 기억 저편의 이야기가 되살아난 것을 보면 현주는 강력한 나의 시절 인연인 듯싶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
신기하게도 현주를 다시 만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7년쯤 지났을까? 지하철에서 영어신문을 읽고 있던 현주와 정말 우연히 만난 것이다.
‘현주는 여전히 영어를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사실 조금은 멋쩍었다. 그래서 난 얼마 후 결혼한다는 말만 하고 몇마디 나누지도 못한 채 갈길을 재촉했다.
친구는 다소 놀라는 눈치였지만 속마음을 드러내진 않았던 것 같다.
짧은 시간이라 연락처도 주고받지 못하고 헤어졌다.
다시 기다려본다
오늘 생각난 김에 학창시절 교복입은 우리들이 예쁘다며 불어 선생님이 찍어주신 사진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보니 우린 앞뒤로 앉아 있었네. ㅎ
범박동이라는 단어로 시작된 기억의 실타래가 풀어준 친구 소환 프로젝트는 대성공인 듯하다.
요즘 나의 일상은 너무도 가혹하게 현실적이고 무기력했던것 같았는데,
그런 멋진 친구의 소환은 이제 긴 무기력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기 위한 어떠한 힘의 작용은 아니었을까?
사진 속 친구들이 하나, 둘 생각나니 마음이 몽글해지는 기분이 든다.
아마도, 그 당시 친구들이 따뜻했던 이유일 것이다.
이름은 잘 기억 못해도,
어딘가에서 더욱 멋있는 모습으로 살고 있을 친구들을 향해 나만의 주문을 걸어본다….
이번 크리스마스, 또 한 번의 우연이 있기를.
'일상에서의 깨달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큰 어머니의 선물 (7) | 2024.12.27 |
---|---|
아버지와 대작(對酌)하는 이유 (0) | 2023.11.28 |
네 잎 클로버(행운)를 찾는 방법을 아시나요? (0) | 2023.10.03 |
땅을 뚫고 나온 새싹을 바라보며…. (0) | 2023.09.30 |
외할머니와의 추억 소환 여행 (0) | 2023.01.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