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저는 가끔 식사 중에 반주 한잔을 합니다. 함께하는 시간이 별로 없다 보니 친정에 가는 날은 아버지께서 시원하게 보관해 두신 술 한잔을 꼭 권하시는데요.
어쩌다 술자리가 길어지고 취기가 오르는 날엔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옛이야기도 꺼내십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같은 이야기를 무한 반복하신다며 손사래를 치시지만, 저는 이따금 아버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려합니다.
베트남 참전용사였던 아버지는 전쟁에서 얻은 목숨값을 부모님께 보내드렸다고 합니다. 할머니께서는 그 돈으로 농사지을 땅을 샀다고 합니다.
갱지에 간략하게 수기로 계약서를 작성했고, 이전등기절차는 밟지 않았다고 합니다. 등기절차가
지금보다는 복잡했을 것이고, 친척 간에 무엇이 못 미더워 그렇게 서둘러서 등기이전까지 해야 하나 하는 느긋한 마음에 미루기도 했을 것입니다. 매수한 토지의 관리 및 농사일은 전 소유자이신 친척분이 계속 경작하기로 했다는데, 그것은 후일 다툼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할머니께서 토지의 소유권을 주장하시자 친척분은 매도한 일이 없다고 했답니다. 저희 부모님은 할머니의 다급한 심정을 알기에 소송을 통해서 힘들게 소유권을 되찾았습니다.
소유권을 되찾아오기는 했어도, 할머니께서 큰아버지의 명의로 매수를 했던 까닭에 아버지는 그 토지에 관해 아무런 권리 주장도 할 수 없었답니다.
게다가 당시 상황을 알고 계신 큰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그 토지를 소송에서 되찾자마자 큰 집 자손들에게 상속이 되었기에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자식 입장에서 억울한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후회해본들 아무 소용이 없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사실 그 땅의 현재가치는 인근 토지에 비하면 가치가 높은 것도 아닌데, 왜 아버지는 그토록 그 땅에 미련이 많으신 걸까요?
저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만들어진 토지라서 집착이 생겼을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한가지가 더 있다면 평소 표현에 서툰 집안의 성격으로 보아 아무도 아버지에게 ‘고생했다’, ‘고맙다’ 등 진심의 말을 전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입니다.
가족 중 누구라도 진심 어린 감사의 표현을 했더라면 아버지도 그렇게 그 땅에 집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도 때로는 남의 얘기는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듣는데 내 부모에게는 그렇게 못 하나 하는 생각에 자성의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깊이 박힌 괴로운 기억의 감정 조각을 모조리 뺄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또한 쉽지 않기에 고통을 드리기보다 조각의 모서리를 조금씩 다듬어 볼까 합니다. 아버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보면 내면의 조각 모서리가 부드러워져 예쁜 구슬로 변하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그 유리구슬로 보는 세상은 밝은 면만 있길 바라면서요.
저는 오늘도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 친구처럼 술을 권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잔을 부딪칩니다.
아버지에게 땅을 돌려드리기는 어려워도, 술잔을 마주하고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아버지와 대작하는 이유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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