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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의 깨달음

큰 어머니의 선물

by blue river 2024.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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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수미 씨가 세상을 떠나던 날, 저녁 큰어머니도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큰어머니는 노환과 지병으로 고생하시며 몇 년 동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지만, 결국 인생의 마침표를 찍으셨다.
며칠 전 추석에도 뵈었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그날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신기하게도 내 나이 26살 그날 가족이 모두 모였고, 26년이 지난 그날 다시 다른 의미로 모두 모였다.
 

큰댁 며느리가 된 나 

 
갑자기 신혼시절 큰어머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당시 큰댁에 양자로 보낸 시어머니의 둘째 아들이 큰집의 장손이었다.
(처음에 이해가 안 되었지만, 그땐 그게 말이 되었나 보다.)
 
그 장손이 미혼인 관계로 집안에는 명절에 일할 며느리가 없었다.
나는 명절 당일 하루 전 남편과 시아버지, 시동생들과 큰댁으로 내려가, 차례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큰댁 며느리인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음식준비 하는데 크게 불만이 없었다.
뭐 처음엔 낯설어서 힘들었 뿐, 어르신분들이 좋은 분들이었고, 내가 조카며느리인 까닭인지 일을 잘 하든 못하든 부담을 주지 않으셨다.
그래서인지 몸은 고돼도 정신적으로 힘들지는 않았다.
 
큰어머니는 늘 큰 소리로 “저 질부 없었으면 내가 이 일을 어떻게 다 했겠 누?”라고 하시며 나를 치켜세워 주셨다.
나는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뿌듯함을 느꼈고, 더 맡기지 않은 뒷정리까지 깨끗하게 하곤 했다. 칭찬받는 것이 좋았으니까.
또한, 큰어머니의 시원스러운 말씀도 좋아했다.
 

걱정스러운 명절

시간이 흘러 10년이 지나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더 이상 명절 차례준비를 위해 내려갈 수 없었다.
시아버지 차례를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하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한다고 했던가? 나머지 식구들이 열심히 힘을 보태서 차례준비를 했다.
그리고, 이젠 큰댁 며느리가 있어서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별 걱정이 없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매고 있을 즈음.
 

시동생의 등장 

저녁시간이 되어서 막내 서방님이 장례식장에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한 동안 왕래가 없었던 사이여서 처음 들어설 때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용기 내어 말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가 그러면  되지 하고 먼저 말을 건넸다.
처음에 좀 민망했지만,  용기를 내어 마주 앉았다.
나도 그때는 어려서 실수를 했노라며 먼저 이야기를 꺼냈더니 서방님도 마음을 열고 자신의 얘기를 했다.
첫째 아이가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같이 오려다 혼자 오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전달했고, 안 볼 것 같이 굴던 남편도 동생이 측은했는지 동생에게 슬쩍 말을 던진다.
이렇게 끊어진 실이 다시 이어진 기분이 들었고, 순간 마음속 응어리 하나가 풀어진 것 같았다.
 

화해의 선물을 받다

아마도 이 자리는 큰어머니께서 우리에게 화해의 의미로 만들어 주신 뜻깊은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무척 슬펐다. 나를 알아주는 분이 돌아가셔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벌써 49재도 지나고 이젠 마음이 정리가 된 듯하다. 이제는 슬퍼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히려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해 본다.
 

큰어머니! 큰아버지 잘 지켜 드릴게요.
걱정 마시고 그곳에선 아픔 없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저희 아버님께 안부도 전해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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